첫째를 임신했다.
내 계산에 따르면 그럴 리 없었다. 분명히 그날은 배란일이 아니라 생리 예정일이었는데.? 9월 17일이 마지막 생리일이었고, 10월 내내 소식이 없었다. 생리불순이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25년간 단 한 번의 건너뜀도 없는 완벽한 생리주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11월 13일, ‘에이. 설마….’라는 생각으로 임신테스트기를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5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역시, 그럴 리가 없지’ 하며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회사로 출근했다.
업무를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려는데 먼저 퇴근한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여보, 테스트기가 두 줄이 되어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한 줄인걸. 확인하고 출근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테이블로 달려가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해 보았다.
흐릿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내비치듯 두 번째 줄이 희미하게 그어져 있었다.
임신테스트기가 다음날 반응하기도 하는 건가? 아리송했던 나는 정확한 사실확인을 위해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바로 산부인과에 갔다.
바로 전년도에 아기를 유산한 경험이 있어 이런 불확실한 결과는 의사의 입으로 듣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우선 배란일이 아니라 생리 예정일이었다는 점, 그리고 임신테스트기가 하루 지나 반응했다는 점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산부인과에 도착하니 마지막 생리일이 언제냐고 물어봤고, 나는 9월 17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담당의는 적어도 8주가 넘었을 거라며 배로 초음파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다행이었다. 자궁경부암 검사 때도 그랬고, 첫째 아기를 유산했을 때도 그랬지만 질 초음파는 너무 싫다.
그런데 담당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하다는 듯 초음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음파 기계를 움직이며 뭐라도 나오길 바라는 듯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아기의 흔적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첫째를 유산했을 때는 아기집이라도 봤는데. 아무것도 못 보다니. 역시 임신테스트기가 잘못된거라 생각하고 단념하려고 했다.
“선생님, 저는 유산 경험이 있어요. 예상하고 있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의사는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피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결과는 몇 시간 만에 빠르게 나왔다. 수치는 596. 임신 4주는 되어야 나오는 수치다. 적어도 임신 5주는 되어야 아기집이 1센티가량 보이고 호르몬 수치가 1,000이 넘는다.
하지만 나는 계산에 따르면 임신 8주여야 하는데.?
이번에도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다. 유산의 상처는 5년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잊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그런 상처이다.
30퍼센트의 가임여성이 유산을 겪는다고 한다. 그만큼 흔한 일이고 대부분은 엄마의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과 몸의 상처는 오롯이 엄마가 다 겪어야 한다.
걱정됐다. 그런 상처를 또다시 안고 살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검색창에 임신 4주, 유산 관련 단어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검색했다.
한 주가 지난 후 또다시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담당의와 초음파를 함께 보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주일 사이에 아기는 내 자궁 한곳에 소중하게 집을 만들어 놓았다.
임신 5주, 생리 예정일로는 임신 9주. 한 달이나 차이가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의사의 답은 명료했다.
“생명은 신비한 거니까요.”
정말 임신이다.
내 첫째 딸 하율이는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나에게 찾아왔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기가 나를 엄마로 선택하기 위해 기다리다가 배란이 한 달이나 늦게 되었나 보다.
나는 유산을 겪었던 지라 심장 소리를 듣기까지, 듣고 안정기가 될 때까지 태어나는 순간까지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아기를 지켜냈다.